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앙투아네트 (문단 편집) === 능력 === 고작 14세 때 프랑스로 시집 와서 태자비가 되었기 때문에 모국에서 지적인 교육을 받을 시간이 부족했다. 모친 [[마리아 테레지아]]는 16남매를 낳고 정치 격무에 시달리느라 아이들에게 충분히 신경을 써주지 못했고 11녀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창 유아기일 때에는 [[7년 전쟁]]을 치르느라 특히 더 바빴다. 따라서 아이들의 교육은 교육 담당에게 맡겨두기만 하고 일정 기간마다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마리아 테레지아]]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직접 양육할 시간이 있었다 한들 제대로 했을지 의심스러운 것이 그녀는 자식들을 심하게 [[편애]]하는 어머니였고 때문에 사이가 좋은 자식들도 있었지만 거의 일평생 사이가 매우 나빴던 자식들도 적지 않았다.[* 이는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남매간의 관계가 뒤틀리는 결과를 낳는다.] 아버지 [[프란츠 1세]]는 그저 자식들의 응석을 받아주기만 하는 예스맨 아버지여서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집안 단속에 신경 써야할 부모가 무관심하니 서로 총애를 얻으려 싸워대는 언니 오빠들과 경쟁하기에 너무 어린 앙투아네트는 모든 면에서 방치 상태였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의 능력에 대해서는 그녀를 가르친 이들 모두가 탄복을 마지않았다. [[빈(오스트리아)|빈]]에서의 [[가정교사]]는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으나 열의가 부족하다"고 탄식했고, 이후 교육을 맡게 된 빈 [[대주교]]는 "모친과 같은 놀라운 지성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하지만 집중력도 낮았고 공부에 대한 열의가 별로 없어서 유년기의 교육은 큰 성과가 없었다. 문제는 부모가 이를 전혀 알지 못할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것. 프랑스에 시집 가기 전에야 막내딸이 일자무식 상태임을 알고 뒷목 잡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앙투아네트가 떠나기 전 수 일간 단둘이 지내면서 많은 것을 가르쳤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전까지 막내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점과 [[정략결혼]]으로 딸들을 희생시킨 것에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막내딸의 미래에 대해서는 다른 딸들보다 불안해하다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를 떠나보내는 날에는 바닥에 쓰러지며 통곡했다.] 이후에도 측근인 메르시 백작을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하루 하루를 전해 듣고, 자주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교육하려 했다. 참고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말과 [[루이 15세#s-5.2.|시고모 3명(루이 15세의 딸들 아델레이드, 빅투아르, 소피.)]]의 말을 듣고 [[뒤바리 부인]]을 무시하는 상황에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어쩔 수 없이 딸을 설득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뒤바리 부인]] 항목을 참고. [[루이 16세]]는 호인에다 자신 때문에 여론에 시달리는 아내 마리의 부탁을 거의 다 들어 주었는데, 이에 우쭐해진 마리가 남편을 '어리석은 사람', '바보' 등으로 부른다는 말을 마리아 테레지아가 전해 듣고는 이를 엄히 꾸짖었던 일도 있다. 즉 '왕비가 존경하지 않는 왕이 과연 백성들에게서 존경을 받을 수 있겠느냐, 너의 행동부터 고쳐라.'의 논조로 딸을 꾸짖은 것이다. 이렇듯 마리아 테레지아는 시집보낸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신경을 썼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매우 두려워했다. 루이 16세와 관계가 지지부진해 아이가 생기지 않는 데 대해 우리말로 치면 '이번에도 [[월경|대자연]]이 찾아왔다'는 식의 사생활 사찰성 보고까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올라갈 정도여서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이로부터 4년 뒤에 시할아버지 [[루이 15세]]가 승하해, 10대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왕비로서 성숙할 만한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